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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목) QT_눈먼 자들

  • Writer: Chang Yong Park
    Chang Yong Park
  • Jan 21, 2021
  • 3 min read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마가복음 10장 46-52절)


무엇을 보고 있는가


구원이란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 여리고에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로, “더러움의 아들”이란 이름이다. 그는 소경이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절기가 다가오면 순례객으로 붐볐다. 걸인들은 구걸을 위해 그 길가에 앉았다. 순례객끼리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예수의 무리가 나사렛에서 왔다는 것을 누군가 물었을 것이고, 이에 나사렛에서 소문난 예수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퍼졌다(47a절).


바디매오는 소리 질러 예수님을 찾았다(47b절). 헬라어 ‘크라조’는 ‘불쾌하게 지르는 소리’로 절규에 가깝다(LN).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적인 찬사다. 그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예수께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고, 가장 높은 아첨으로서 예수의 이목을 끄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 많았다(46b절, 48a절).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었다. “잠잠하라!”(48a절).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를 부르라”(49a절).


오늘의 이야기는 앞서 ‘부자 청년’과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에 이은 3부작 결론이다.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예수를 떠났다. 야고보와 요한은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예수와 함께 있었지만 마음을 같이 하지 않았다. 오늘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었지만 저마다 다른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동을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를 부르라(49절)’로 번역된 헬라어 ‘포네오’는 전화기(phone)의 어원이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음을 의미하는 이 말은 예수님과 바디매오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다양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도 예수님은 삭개오를 발견하듯이 자신을 찾는 자를 발견하신다. 그는 ‘겉옷을 벗어두고’ 내달렸다(50절).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을 뻗고 사람을 가르며 나아갔다. 심장이 고동쳤고 마음이 앞섰다. 그가 버린 겉옷은 망토로, 거지였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일교차가 심한 중동지역에서 여행객들은 필수로 두꺼운 망토를 챙겨 입었다.


예수님은 물으신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절). 우리는 앞서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에도 똑같이 되물으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10:36절). 이것은 거지였던 소경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된다. “자선이냐? 보는 것이냐?” 부자 청년과, 야고보와 요한은 전자를 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후자를 택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 본문에서 거지는 더 이상 바디매오가 아니다. 자선을 구걸하는 자는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제자들임이 드러났다.


같은 것을 보라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깨우치신다. 또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치신다. 그래서 그는 ‘고통’, ‘기다림’,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도구로 사용하신다. C. S. 루이스는 “고통은 귀먹은 백성에게 외치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말했다. 학자들은 그가 눈이 멀기 전에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그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로 묘사되지 않는다). 고통은 그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깨우쳐주었다.


예수님은 또한 기다리셨다. 49절 “머물러 서서”. 그의 기다림은 사실 다가옴을 의미한다. 그분은 다가오시기 위해 기다리셨다. 그 기다림은 소경에게 유익했다. 예수님은 그의 필요가 무엇인지 질문하셨고, 치유하신 다음에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a절). 이것은 또 한 번 제자들의 생각과 달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선을 베풀되,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소경은 원하던 것을 얻었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도 좋다’는 말씀에 그는 인생에 다시 한 번 중요한 질문을 받는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보는 것’인가? ‘보게 해주시는 분’인가?” 마가는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고 진술한다(52절). 그는 예수의 제자로 살기로 했다. 무리의 행렬에 있어도 일행이 아닐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한다(히11:1절). 우리가 바라는 것이 곧 우리의 믿음이기도 하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는가. 예수께서 무엇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이 당신의 ‘주(Lord)’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자의식, 그분이 생각하는 자신과 우리가 바라는 그분이 다를 때 우리는 그분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함께 있지만 다른 곳을 향해 간다. 눈을 떴지만, 소경 일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눈을 떠 그분과 같은 것을 보기 원하신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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