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금) QT_보화를 발견한 신자, 진주를 발견한 하나님
- Chang Yong Park

- Jan 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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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태복음 13장 44-58절)
신자들의 보화, 하나님의 진주
예수님은 세 가지의 비유를 들어 천국에 대해 설명하신다. 44절과 45절, 47절은 각각 “천국은 무엇과 같다”라는 세 가지의 명제로 천국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첫 번째,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밭에서 일하던 일꾼은 일하는 와중에 밭에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당장에 소유할 수 없다. 그 땅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보화를 땅에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땅을 구입하였다. 보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화는 천국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 이 보화를 당장에 모두 소유할 수 없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것을 모두 팔아 그 땅을 구입하여야 한다. 이미 받은 구원이지만, 아직 오지 않은 완성을 향한 헌신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반면에 두 번째의 비유에서는 천국이 값진 진주로 비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천국을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 장사꾼은 좋은 진주를 찾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 보인 극히 값진 진주 하나가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장사꾼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구입하였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보화 같은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인생의 한 자락에서 발견한 이 진리는 마치 우연과 같이 신자들의 인생에 찾아온다. 하지만 그 뒤에는 우리들을 값진 진주라 칭하시며, 우리를 찾으러 헤매는 장사꾼의 세밀하고 섬세한 손길이 있었다. 그 장사꾼은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값을 치루어 그 값진 진주를 얻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받게 된 구원의 값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치루신 생명의 값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극히 값진 진주라 칭하시며 귀하게 여기신다.
나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에 충성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나를 값진 진주라 평하시며, 모든 소유를 다 팔아 헌신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가?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해야 할 것
천국에 대한 마지막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신자들의 소망과 책임에 대해 말씀하신다. 세 번째 비유에서 천국은 물고기를 모는 그물로 비유된다. 이 그물에 담긴 것들은 물가로 올려진 이후에 좋은 것과 못된 것으로 구별된다. ‘좋은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칼라’는 기준에 적합하다는 의미이며, 못된 것으로 번역된 ‘사프라’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도덕적 구분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구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마지막 날에 골라내실 것이라는 이 마지막 비유는 신자들 스스로가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성도는 마지막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자들이다.
이 비유의 끝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깨달음의 뒤에는 행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서기관’이라는 구약적 표현과 함께 ‘천국의 제자들’이라는 신약적 표현을 사용하셨다. 신약과 구약에 대한 조화로운 표현은 이후에 언급되는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에 대한 묘사로 완성된다. 제자들은 율법을 새 계명으로 완성하여 아름답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은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별하실 것이다. 나는 얼마나 인내하며 보화와 같은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힘쓰며 살아가고 있는가?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
비유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배척하는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마태가 예수님의 목적지를 특정한 지명이 아닌 ‘파트리스’, 즉 ‘고향’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는 실제 그의 고향과 친척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셨다. 그러나 비유를 전하신 예수님의 행선지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의 고향이었다. 마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동시에 마태는 더 넓은 의미의 고향, 곧 이스라엘로부터 배척을 받으실 것에 대한 복선적 선언을 하기 위해 중의적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다음 장의 서두에 시작되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더 강화된다.
그러나 “선지자는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는 말씀(57절)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가져다 준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손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은 모든 민족과 나라들 위에 지금도 흐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척하는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배척과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뒤돌아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 나는 배척을 이기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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