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금) QT_무엇을 원하느냐?
- Chang Yong Park

- Feb 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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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마태복음 20장 17–34절)
욕심으로 구하는 두 제자
욕심은 눈과 귀를 멀게 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신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클라이맥스를 찍는 매우 중요하고도 무거운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간청한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1절).
단순히 아들들을 출세시키려는 극성맞은 어머니의 모습이었을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22절). ‘너희’라는 복수형을 쓰셨다. 그뿐만 아니라 평행구절인 마가복음에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막10:35)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명확히 야고보와 요한의 욕심이었다.
그들의 요구를 말하기 전에 예수님께 와서 엎드려 절을 했다. ‘절하다(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는 ‘입 맞추다’라는 뜻으로, 당시에 통치자를 신격화하거나 로마 황제숭배와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경외하는 엎드림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의도를 가진 엎드림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어땠을까?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4절). ‘분히 여기거늘’로 해석된 ‘아가나크테오’는 ‘많이’라는 뜻의 ‘아간’과 ‘슬퍼하다’라는 뜻의 ‘아코마이’의 합성어로, ‘격분하다’, ‘분개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 욕망을 가진 야고보와 요한을 격하게 질투하는 나머지 제자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중심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평행구절 누가복음에서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4).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의 욕심이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절실함으로 구하는 두 맹인
기회를 잘 잡으면 인생 역전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동하던 중 두 맹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외친다. “소리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0절).
‘소리지르다(크라조)’는 까마귀가 우는 소리에 근거하여, 귀에 거슬리거나 목이 쉰 소리를 뜻한다.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나 정말 간절하게 울부짖으며 외쳤다. 당시에는 장애가 있는 이들을 혐오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꾸짖으며 조용히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더욱 크게 소리질러 간청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외침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앞서 두 제자의 구함과 달리 두 맹인의 구함은 절실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어!” 마지막 희망이기에 사람들의 만류에도 절실하게 외쳤다. 욕심을 채우기 위한 구함이 아니라 살기 위한 구함이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34절). 그들이 눈을 떠서 가장 처음으로 본 것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눈을 뜨게 된 기쁨만 만끽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따랐다.
나는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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