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금) QT_주님, 제가 그입니다.
- Chang Yong Park

- Feb 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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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14장 12-21절)
“나는 아니지요?”
주님 가까이 있다하여 저절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18절). 주님의 이 한 마디에 유월절 만찬 분위기는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주님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열두 명 모두가 용의자가 된 것이다.
요한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 13:22). 그 싸늘한 분위기를 상상해보라. 서로를 향한 눈빛은 마치 칼같이 날카로웠을 것이다. 곧 정적을 깨는 질문이 누군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아니지요?(이는 ‘분명한 부정’을 의미하는 의문문이다)” 그러자 모두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했다. “주님, 저는 아닙니다. 제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는 아니지요?” 마태는 주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마저 동일한 질문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고 증언한다(마 26:25).
만약 주님이 그 자리에서 유다의 복면을 벗기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악한 유다 덕에 나머지 제자들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며 묘한 안도감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동시에 그를 향해 분노 가득한 비난을 쏟아냈을 것이다. “우린 적어도 주님을 팔지 않아! 유다 당신에 비해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들 역시 주님을 배반한 자들이다. 결정적인 순간을 마주하자,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막 14:50).
우리로 인한 그리스도의 죽음
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셨다(13-15절). 자신의 ‘때(ὥρα)’가 가까이 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막 14:35). 제임스 에드워즈의 말처럼, 주님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 비극적인 영웅이 아니다.
주님은 이미 세 번에 걸쳐 자신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다(막 8:31; 9:31; 10:32-34). 그리고 반드시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 강조하셨다.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21절),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셨다.
무엇 때문인가? 유다의 배반 때문인가? 제자들의 교만함 때문인가? 아니다. 모든 화살을 그들에게만 겨눌 수 없다. 성경은 우리 모두를 죄인이라 말하기 때문이다(롬 3:9-18, 23; 5:8). 그렇다. 우리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마주해야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중 그 누구도 ‘나는 아니지요’라고 반문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주님, 제가 그입니다.” 내가 주님을 팔아넘긴 자다. 내가 주님의 원수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확증해 주셨다(롬 5:8). 그 놀라운 대속의 은혜는 우리의 한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타인을 악으로 규정하여 스스로 의롭게 여기려하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다. 또한 동시에,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용납 되었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한다.
마틴 루터의 고백처럼, 우리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기보다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하며, 타인을 악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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