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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월) QT_진정한 왕, 위장된 백성

  • Writer: Chang Yong Park
    Chang Yong Park
  • Feb 7, 2022
  • 2 min read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21장 1–11절)


진정한 메시아


주인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찬송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보다 훨씬 더 큰 적을 물리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 고독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그 사랑의 깊이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마가와 누가와는 달리 마태는 ‘나귀 새끼’만 언급하지 않고,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언급한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마태복음의 일차 독자인 유대인들에게 오실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선포하는 왕의 행차 시에 보통 말을 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심으로 평강과 겸손의 왕이심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바쳐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기 위한 ‘평화의 메시아’임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어 맞은편 마을에 매여 있는 나귀를 끌고 오게 하신다. 사전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마치 자신의 소유처럼 가져오도록 명령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선언하시는 장면이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


‘주’로 번역된 ‘퀴리오스’는 ‘주인, 지배자’라는 뜻이다. 퀴리오스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서 ‘그 주인’이 된다.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신다. 짐을 옮기는 데 쓰여왔던 나귀가 예수님을 태운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모시면 그 인생은 천국이 된다.


위장된 신앙


확고해야 휘둘리지 않는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렬 앞에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길에 펴 놓았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깔아놓는 행위는 왕을 영접하거나 왕이 즉위해서 말을 타고 갈 때 백성들이 행하는 최고 존경의 표현이었다. 또한 사람들이 깔았던 나뭇가지는 종려나무(요12:13)였는데, ‘승리’와 ‘기쁨’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예수님의 행렬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반응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다수’라고 번역된 ‘플레이스토스’는 ‘매우 많음’의 의미이다. 유월절 명절 기간을 앞두고 정말 많은 사람이 이 기쁨의 행렬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행렬로 인해서 온 성이 소동했다고 기록되었다. ‘소동하다(세이오)’라는 단어는, 지진으로 인해서 땅이 흔들리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그 현장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말해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이 어떻게 변했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선동당한 그들이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 27:23).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소망을 믿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갇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구원이 무엇이었는지? 세우실 새로운 나라가 어떤 나라였는지? 그들은 알지 못함으로 쉽게 휘둘렸다.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예배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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