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금) QT_다시, 건축
- Chang Yong Park

- Mar 1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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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3.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6.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 7. 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8. 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9. 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 하고 10. 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11.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12.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13.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14.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15. 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16. 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17.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에스라 5장 1-17절)
다시 시작되는 성전 건축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을 때, 우리는 어벤져스로 다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 에스라 5장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성전 재건 사업이 시작되는 기점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이 결국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강렬했다. 성전 건축에 대한 게으름은 곧 하나님에 대한 태만함이다. 잘못 설정된 삶의 우선순위가 결국은 그들의 삶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2절에 성전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는 히브리어 ‘쉐레’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먼저는 ‘풀어놓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정부에 의해 공사가 중단된 규제가 풀어짐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놓아주다’라는 의미도 지니는데,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해 준비되었던 건축자재들을 다시 꺼내어 사용하게 되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앞서 그들의 공사를 방해했던 대적들과 같은 사람들이 다시 등장한다. 그들은 성전공사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허가’ 여부를 물었다. 물론 성전 재건 사업을 중단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가운데 5절에 하나님께서는 유다 장로들을 돌보고 계셨다. 여기서 돌아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웨엔의 원형 ‘아인’은 눈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전치사 ‘알(~위에)’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눈이 유다 장로들의 위에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왕의 사람들이 맡은바 관할을 돌아보며 살필 때, 하나님의 눈은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고 계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금세 지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우리가,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게 될 때 힘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잠시 중단하였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다시 사명을 감당할 시간이다.
하나님의 종들
올바른 정체성은 정체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아내는 원동력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건축에 의문을 제기한 닷드내와 스달보스내는 그들을 심문했다. 그리고는 다리오 왕에게 현 상황에 대해 보고를 하였다.
11절 이하는 스룹바벨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성전 재건 사업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일전에 브슬람, 미드르닷, 다브엘은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된 이유를 왜곡하여 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성전이 무너진 이유를 ‘살아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함’이라고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이사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는 그들이 천지의 하나님의 종(스5:11)임을 천명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들의 신분과 더불어 현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결국은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재개하는 힘을 얻게 했다.
다행히도 닷드내와 스달보스내는 일전의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과 같이 편파적이고 완악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들이 맡은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여 왕의 명령과 나라의 안위를 돌보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거하는 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자녀들이 온전하게 세워가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기쁘신 왕의 뜻을 ‘보이소서’라고 요청한 그들 말의 원뜻은 히브리어 ‘쉘라흐’에서 파생이 되었는데, 문서나 사람을 보낸다는 뜻이 있다. 즉, 왕께서 그들의 편지를 읽고 그에 합당한 처사를 답해주실 것을 기다리는 매우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주위에 우리를 방해하고 괴롭게 하는 대적들이 있다. 그러나 반면, 우리가 더욱 명확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중립적인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선한 싸움을, 협력하고 도울 수 있는 자들에게는 우리들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더불어 선한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에 멈춰진 사명을 ‘다시’ 감당할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Photo by nick fewing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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