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3월 25일(월) QT 진짜 사랑하려면

  • Writer: Chang Yong Park
    Chang Yong Park
  • Mar 25, 2024
  • 3 min read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3)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장 27~38절)


원수를 사랑하라


진짜 사랑은 나를 사랑할 때보다 남을 사랑할 때 빛이 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최고단계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을까? 몇몇 학자들은 원수 사랑의 가르침은 실제로 실천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지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리기 위해 쓰였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 사랑은 우리가 실천하기에 불가능한 사랑일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예수님은 ‘원수를 갚지 말라(레 19:18)’는 레위기의 말씀보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여기서 ‘원수’의 헬라어 ‘에크드로스’는 ‘증오’를 뜻한다. 구약에서는 우상 숭배자들이나 계약 관계를 깨뜨린 자들, 즉,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들이다. 그런 당연히 증오스럽고 피하고 싶은 자들을 선대하고, 저주받을 자들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며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죄인인 우릴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예수님께 큰 빚을 진 우리는 거절할 자격이 없다. 그가 본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못 박은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셨다(눅 23:34).


우리는 계명을 완벽하게 행할 수 없다. 원수 사랑의 가르침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쁨으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 사랑을 따르기를 소망한다.


오늘 나는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꾸어주라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마태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고 말한다. 또 꿔달라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고 꾸어주라고 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꿔달라는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눅 6:34). 그뿐 아니라 꾸어준 것을 다시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누가복음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이다. 


여기서 ‘꾸어준다’의 헬라어 ‘다네이조’는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행위를 뜻한다.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데 모든 선물을 선뜻 주라는 뜻으로 쓰인다. 다시 말해, 받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꾸어달라고 할 때 그것은 큰 것이 아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눅 11:5)를 우리는 잘 안다. 친구는 ‘빵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사정한다. 삼시 세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와서 빌려달라고 할 때가 있다. 그때, ‘이자 붙여 언제까지 갚으라’라는 야박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이 빌려달라고 할 때면 돌려받을 생각하지 말고 행동하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 때 주위에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청하지 말라고 하셨다. 가난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보지 못하는 자들을 초대하라고 하셨다. 그들을 대접하라고 하셨다(눅 14:12). 그들은 잔치 대접을 받아도 갚을 길이 전혀 어려운 자들이었다.


최고의 선물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 진짜 선물이다. 대가를 바라는 대접은 청탁이고 뇌물이다.


나는 오늘 주변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대접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흘려보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ree

 
 
 

Comments


Join our mailing list

Never miss an update

  • c-facebook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