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수) QT 구원에 대하여
- Chang Yong Park

- Mar 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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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누가복음 7장 1~17절)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사랑하면 보지 않고, 믿는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을 때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 찾아왔다(3절). 백부장이 보낸 자들이었다.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종을 살릴 수 있는 분임을 믿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된다(롬10:17).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간구하며 그를 도와야 할 이유를 말했다(4-5절). 당시는 반유대주의의 이방인과 이방인을 경멸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백부장은 유대인을 사랑하고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세웠다. 그를 경멸해야 할 유대인들도 오히려 그를 친밀하게 여기고 그를 위해 중재를 했다. 이는 분명 특이한 모습이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장로들과 함께 가시려고 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다시 친구들을 보내 자기 생각을 전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6절 하반절).
왜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는가? 여기서 ‘수고하다’(스퀼루)는 ‘스스로 괴롭히다’, ‘귀찮게 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병든 종을 위해 직접 오셔서 고치시는 것은 귀찮고 성가신 일이라는 백부장의 생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백부장은 집에 모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향해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다(9절). 백부장의 말 속에는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치유의 능력은 예수님께 있었다. 직접 보고 만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와 삶에 대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가? 이 구원에는 믿음 외에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음을 고백하는가?
오직 은혜
은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이다.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신 후 예수님은 나인 성으로 가셨다. 예수님께서 성문에 이르렀을 때 과부의 죽은 아들을 메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당시 과부는 스스로 생활해 나가기 어려웠다. 사회적 약자로서 고아와 함께 보호하고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아들마저 잃었다. 현재는 물론, 미래도 불투명해
졌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절). 예수님도 과부를 보시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을 살리셨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는 기적을 보며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이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특별하다. 과부는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했고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아무 조건 없이, 맥락 없이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은혜를 베푸셨다.
왜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살리셨는가?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이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통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감히 하나님께 요청할 수도 없는 죄인이다.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을 베푸셨다. 아무 조건 없는, 일방적인 관심과 긍휼로 베푸신 은혜다.
나는 구원을 요청할 자격도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가? 나에게 구원의 은혜는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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