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월) QT_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
- Chang Yong Park

- Mar 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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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태복음 26장 57-75절)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예수께서 잡히시자 모든 제자는 그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예수는 고독히 붙잡혀 대제사장 가야바와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인 공회에 끌려온다. 랍비들의 구전 율법 규정집인 미쉬나에 의하면 밤에는 그 어떠한 사형에 관한 재판도 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붙잡히고 심문당한 시간은 새벽녘을 기다리는 깊은 밤이었다.
새벽이 되어 공식적인 공회를 열어 예수의 사형 죄목을 선고하기 위해 비공식적이며 불법적인 심문을 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를 칠 거짓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여기서 ‘찾다’로 번역된 ‘에제툰’은 미완료 시제로 끊임없이 그들이 예수를 무너뜨릴 증거를 찾고 시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발언을 문제 삼아 심문하기 시작한다. 보이는 건물로의 성전의 의미를 넘어 이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마다 성전이 되는(고전 3:16) 새 성전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사흘은 완전한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예표로 보이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것과 당신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 나사로를 죽은 지 사흘 만에 살리신 모습들을 통해 완전한 죽음을 통하여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짐을 선포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많은 사람 앞에서 고백하게 하셨으며 끝내 이를 통해 유대인에게 최고의 형벌을 받을 수 있는 ‘신성모독’의 죄를 씌워 예수를 조롱하고 고통을 가한다.
인간의 시선과 생각으로는 모든 것이 불합리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나 예수의 수난도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말씀들의 완전한 성취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과 사심, 그리고 죽으심은 예언과 성취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때 이해할 수 있다.
예언된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성취됨의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볼 때,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는가?
베드로의 통곡
회개는 후회와 다르다. 앞선 마태복음 26장 33절에는 베드로의 야심 찬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가 주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을 이르셨다.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으며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를 따라 결말을 보고자 했다.
그때 한 여종이 나아와 베드로를 향해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음을 이야기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며 첫 번째로 예수를 부인한다. 이후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는 강도가 점점 세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모른다는 것에서 다음 여종을 만날 때는 맹세하며 부인을 하더니 기어이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하여 자신과 관계없음을 선포하는 데까지 다다른다. 모두가 주를 떠나도 기꺼이 주님을 따르겠다던 베드로의 호기로운 고백은 저주와 맹세를 담은 부인으로 결론을 맺는다.
여기서 저주는 헬라어로 ‘카타테마티조’인데, 이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저주가 내려져도 좋다는 일종의 자기 저주적 맹세를 가리킨다. 자신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뱉어냈다.
그때 닭이 울었다. 일전에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이르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베드로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과 수치스러움, 그리고 주님에 대한 미안함이 복잡 미묘하게 섞여 큰 울음의 통곡으로 터져 나왔다. 마태는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단회적 울음을 표현했지만, 마가는 미완료 과거 시제인 ‘에클라이엔’을 사용함으로 베드로의 통곡이 계속되었음을 나타냈다.
심히 슬퍼하며 통곡하던 베드로의 울음은 똑같이 주를 배반하고 떠났음에도 회개가 아닌 단순한 후회로 그친 유다의 죽음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베드로는 연약하고 실수가 많은 죄인임에 틀림이 없지만, 자신의 잘못과 부끄러움에 대한 눈물의 회개가 훗날 그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예수를 그리스도이심으로 증거가 되는 삶을 살아내도록 하였다.
나도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하나로 위기와 곤경에 처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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