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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수) QT_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

  • Writer: Chang Yong Park
    Chang Yong Park
  • Mar 9, 2022
  • 3 min read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태복음 27장 11-26절)


예언의 성취자, 예수


결국, 총독 빌라도와 예수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칭한 신성모독으로 인하여 종교적 관점에 의해 사형 집행을 요구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관심과는 달리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이사야 53장 7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온 어린 양과 같이 침묵하셨다.


개역 개정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는데, 원문을 살펴보면 ‘프로스’라는 전치사의 역할이 있다. ‘~을 향하다’라는 의미가 있는 프로스가 ‘마디’로 번역된 ‘레마’와 만나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데, 여기서 레마는 ‘고소, 비난’의 의미로 사용이 된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고소와 비난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신 것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살기 위해 노력을 한다. 반면, 예수님은 약속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셨다. 그 어떤 변명도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위하여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얼마나 참고 견딜 수 있는가?


저주받은 자의 상징, 십자가


대신 십자가 저주를 받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본문의 18절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시기와 정당하지 않은 사유로 고발당함을 알고 그에게 특별사면을 내리고자 하는 장면을 담아내고 있다. 명절이 되면 총독의 권한 아래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회중들의 선택을 요구한다.


바라바는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법정에 서신 예수님과 ‘아버지의 아들’로 법정에 동시에 서게 된 이 장면은 결코 우연적인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들이 많았음을 언급하며, 바라바의 이름 역시 ‘예수’였다는 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마태는 그 이름을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하지 않은 채 ‘바라바(아버지의 아들)’로만 남겨 놓는다. 바라바는 아마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민족주의적 혁명가로 추측이 된다. 빌라도의 마음속에는 그를 이미 십자가에 못 박기로 했었는데, 유대인들의 요구로 인하여 바라바는 석방이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던 무리는 더 나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다. 무고한 자의 죽음 앞에서 무척이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빌라도의 모습과 는 다르게, 이스라엘 민중들은 실로 과감했다.


십자가형을 앞둔 죄수에게 통상적으로 채찍질을 가하게 되는데, 이때 채찍질은 끈에 날카로운 조각들을 단 채찍으로 시행이 되었다. 심하게 채찍질을 당하면 뼈가 드러날 정도의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아마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한 배려 아닌 배려가 채찍질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묘사가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일이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저주받은 자가 되어주심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통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저주받은 자가 되어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명백하게 선포한다. 죽음의 공포와 하나님과 의 단절의 아픔 앞에서 침묵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가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원받게 될 우리를 생각하사 기쁨으로 나무에 달리셨다.


그리스도가 달리셨던 그 저주받은 나무 위는 바로 나의 자리이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어떻게 묵상하며 바라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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