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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금) QT_피상적인 회개에서 벗어나자

  • Writer: Chang Yong Park
    Chang Yong Park
  • Apr 1, 2022
  • 2 min read

"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5.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예레미야 3장 1-5절)


매춘부와 같은 유다


하나님은 유다의 반복적인 행음을 경고하신다. 신명기의 율법은 이혼당한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가 다시 이혼을 당했을 때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금한다(신 24:1-4). 하나님은 작금의 유다가 바로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부정한 여인과 같다고 지적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일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신앙하였다.


하나님은 그러한 유다에게 물으신다. “그런데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기에서의 ‘돌아옴’은 구약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회개’로도 번역되는 ‘슈브’가 쓰였다. 독자들은 예레미야서를 따라 읽다 보면, 여기에서 처음으로 본 단어를 마주한다.


이 구절은 약간의 번역적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성경은 본문을 의문문으로 번역한다. 하지만 KJV와 개역개정의 난외주는 본문이 “내게로 돌아오라”라는 명령형으로 번역될 가능성에 관해서 언급한다. 돌아올 마음조차 없었던 독자들에게 이 본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로 돌아와야 한다”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경험된다. 동시에 많은 죄를 짓고도 형식적인 회개를 하는 독자들에게는 “너희의 돌이킴은 진실한 돌이킴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책으로 들린다.


나는 오늘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거절하는 강퍅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회개는 다시 죄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통회를 포함하고 있는가?


행음의 결과


반복되는 죄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심마저도 앗아가 버렸다.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삶을 살았다. 가나안 지역의 풍요의 신이었던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드리며 육신적인 풍요를 꾀했다. 그 결과로 단비가 그치고 늦은 비가 없어졌다.


여기에서의 ‘늦은 비’는 곡식이 잘 익도록 3~4월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또한 ‘단비’는 소나기를 언급할 때 쓰이는 말로써 농사에 도움이 되는 비를 가리킨다. 즉 유다는 풍요를 위하여 다른 신을 경배했지만, 그 결과로 오히려 큰 가뭄이라는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실질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였다. 신명기에 따르면, 그들이 받은 가뭄이라는 저주는 그들의 잘못된 신앙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줄 몰랐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은 이들이 “창녀의 낯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나의 삶 가운데 드러난 결과들을 통하여 나의 그릇된 행동들을 알려주시기도 하신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사람인가?


아버지의 사랑을 이용하는 아들


회개는 삶을 돌이키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오늘의 마지막 비유는 이스라엘의 혼합주의적 신앙생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본문에서 아들은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의 부정(父情)에 호소하며 계속 용서해주기를 간청한다. 하나님은 그 중심에 실제적인 돌이킴이 없음을 보시고는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의 간청은 허울뿐인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언어적인 행위만을 포괄하지 않는다. 회개는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내 삶의 죄악 모두에게서 돌이키는 행위 일반을 포함한다. 구원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아직 죄에 대한 소욕이 남아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내 안에 어떠한 그릇된 욕심이 남아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나는 늘 용서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반복적으로 죄악으로 돌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내가 하나님께 드릴 회개의 영역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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