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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수) QT_분별의 삶

  • Writer: Chang Yong Park
    Chang Yong Park
  • May 11, 2022
  • 2 min read

"19장 1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20장 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예레미야 19장 14절-20장 6절)


진짜 지켜야 할 것


보이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지켜야 한다. 성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바스훌은 임멜의 아들이고 성전의 총감독을 맡은 제사장이다. 그는 대제사장은 아니었지만, 꽤 높은 자리에서 성전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잘못된 예언을 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을 채워 베냐민 문 위층에 묶어 두었다, 예레미야에게 수치를 주고 조롱을 주어 그의 예언 활동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해야 할 성전의 총감독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공연히 대적하고 있다. 그런데 예레미야 1:10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셨다. 여기에 쓰인 ‘파카드’에서 나온 말이 바스훌의 직책인 ‘파키드’이다.


즉 하나님이 세우신 감독(예레미야)과 사람들이 세운 감독(바스훌) 사이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김근주). 이 둘의 차이는 어디에 있나? 하나님이 세우신 감독은 말씀의 권위에 복속되지만, 사람이 세운 감독은 말씀의 권위를 넘어서 말씀을 대적한다.


진짜 성전을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말씀을 지키는 자가 성전을 지키는 자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짜 평화


누가 평화를 깨는 자인가? 예레미야를 가둔 다음 날 바스훌은 자비라도 베푸는 듯이 그를 풀어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입술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한다. 여호와께서는 너의 이름을 바스훌이라 하지 않고, ‘마골밋사빕’이라 할 것이다. 그가 사방에 끔찍한 일을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바스훌의 거짓 예언 때문에 그것을 듣고 따르던 친구가 죽고,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며, 모든 부요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그가 바벨론 땅에서 죽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마치 예레미야가 평화를 깨는 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화를 깨트리는 자가 바스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진짜 두려움


아닌 줄 알면서도 자기의 고집을 꺾지 못하는 미련함을 버려야 한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대적하기 위해 주는 징벌은 기대되었던 것보다 가벼운 것이었다. 예언자의 선언은 매국적인 내용이었지만, 그 징벌로서 받은 벌은 고작 나무 고랑을 차고 갇혀 있는 정도였다.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하는 애매한 사람들의 태도 때문이다(로날드 클레멘츠).


선지자는 어느 정도 두려움의 대상이면서도, 불신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애매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잘못된 고집 때문이다. 선지자의 메시지를 기울이고 싶지는 않지만, 선지자를 대적하여 자기의 길을 망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은 그들의 곧은 목이다(15절). 그들은 자기의 길을 포기하지 못하고 고집을 꺾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더 두렵게 여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자기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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