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QT 믿음의 목적
- Chang Yong Park

- Jun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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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누가복음 22장 54~71절)
예수를 부인하는 믿음
교만한 자는 은혜를 잊고, 배신한다. 예수님은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한순간에 죄인의 자리에 섰다. 베드로는 실망했다. 그는 예수님을 지키려고 칼을 들었다. 그러나 체포된 예수님을 바라보며 실망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심히 통곡했다. 예수님의 예언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 그런데 결국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많은 사람이 그를 걱정한다. 그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 스스로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는 것, 그것이 우리 사람의 교만이다.
예수를 부인하는 믿음은 다름 아닌 교만함을 말한다. 베드로처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교만이다.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그리고 베드로의 교만을 고발한다. 베드로는 사람들과 함께 불을 피우고 앉아 있었다. 그 속에 숨어서 자신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그 불빛이 오히려 그를 드러나게 했다.
이처럼 우리의 교만은 반드시 드러난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반드시 드러난다. 나무 뒤에 숨었던 아담도, 군사들 사이에 숨었던 아합도 결국 드러나고 징계를 받았다. 반대로 감옥에 숨겼던 요셉도, 동굴에 숨겼던 다윗도, 구덩이에 숨겼던 예레미야도 하나님은 드러내시고 영광을 받으셨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예수님 발 앞에 내려놓고 기도해야 한다. 은혜로 인해 덮어져야 한다. 불을 피우며 숨지 말고, 은혜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믿음
믿음은 타협이 아니라 선포하고 결단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체포되셨다. 제자들은 떠났고 베드로는 부인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희롱을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63절). 제자들은 그 희롱과 폭행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떠나고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희롱과 폭행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셨다.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절)라고 선포하셨다. 이처럼 믿음은 희롱과 폭행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믿어야만 하는 절대 의무의 명령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까? 이 정도의 희롱과 폭행은 거의 없는 시대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조롱 섞인 말 한마디에 복음 선포를 양보한다. 폭행은 아니지만 어떤 피해를 두려워하여 복음을 타협한다. 이것은 베드로의 교만과 다를 바 없는 교만이다. 결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믿음에 쉽게 만족해 버린 교만이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부인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는 점이다. 베드로의 부인에도 예수님은 계속 복음을 선포하셨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40).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교만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신다. 크고 위대하신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라고 하신다. 이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베드로의 부인을 고백으로 바꾸신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할 것임을 믿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는가? 양보와 타협으로 복음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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