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수) QT 예수님의 재판
- Chang Yong Park

- Jun 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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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누가복음 23장 1~12)
죄 없으신 예수님
누명 씌우기는 쉬워도, 벗기는 어렵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있다. 오늘 말씀에서 그 이유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바로 모함하고 누명 씌우는 사람들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 안에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 삶에도 억울함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이유로 힘든 시간을 통과 중일 수 있다.
예수님의 누명조차 오히려 인류를 구원하시는 과정으로 사용하심을 기억하자. 내 삶의 억울한 상황도 반드시 영광 받으시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심을 신뢰하자. 이것이 가능해지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기도하자. 초자연적인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십자가의 억울함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본받자.
반대로 누명 씌우는 자들의 말을 살펴보라. 교묘하게 거짓을 섞는다. 그들의 주장처럼 백성을 미혹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 진리를 선포하신다. 참된 구원의 길을 전하신다. 세금을 금하셨는가? 역시 아니다.
그들의 가장 큰 누명은 이 부분이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고 다닌다며 모함한다(2절). 예수님께서는 어디서도 공개적으로 자신을 ‘왕 그리스도’라고 선포한 일이 없으시다. 이전에 복음을 전하시던 부분을 전부 살펴보라.
그러나 빌라도의 질문에는 왕의 정체성을 인정하신다. 그동안 한 번도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말이다(3절).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모함은 계속된다. 무장 반란을 일으킨다고 말이다(4-5절).
나 자신은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는가? 지금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은혜가 필요할까?
침묵하시는 예수님
물은 깊을수록 잔잔하고, 소리가 없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낸다(6절). 헤롯은 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자다.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일까? 아니다. 마치 광대를 보듯이 예수님의 기적을 구경하고 싶어서다(7-8절).
헤롯은 기적을 구경하고 싶어서 신난 것 같다. 예수님께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9절에서 ‘물으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페로타오’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묻다, 요구하다, 바라다’라는 의미다. 단순히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기적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 출석하는 이유를 점검해보자. 예수님을 사랑해서인가? 아니면 헤롯처럼 주님의 능력을 보고 싶어서인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답변도 하지 않으신다. 누명을 쓰셨기에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호의를 가진 헤롯의 도움을 받지 않으신다. 모함당한 내용들을 변호하시지도 않으신다(9절).
그 이유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다. 기적을 보고 싶어서지만 헤롯은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변명하실 수 있으시다. 도움받을 수 있으시지만 계속 침묵하신다. 도움받으시는 순간 나의 구원을 성취하실 수 없으시다. 이것이 나를 위해 묵묵히 누명을 쓰신 예수님의 사랑이다.
빌라도와 헤롯은 평소에 원수 관계였다. 하지만,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원수도 친구가 된다(12절). 세상 사람들도 언제든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원수가 된다. 그리고 친구도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사랑받은 사람답게 신의를 지키는 자다. 우리는 생명 주신 예수님과의 신의를 지키는 자들이다.
나 자신은 하나님의 선물보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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