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목) QT 예수님의 2차 재판
- Chang Yong Park

- Jun 27, 2024
- 3 min read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17 (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누가복음 23장 13~25절)
엉터리 재판
재판의 판결이 다시 재판받도록 해서는 안 된다. 재판은 잘해야 한다. 공정해야 한다. 공정하게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법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무 죄가 없음을 선언한다.
14절에 ‘너희가 고발하는’이란 말은 헬라어로 ‘카테고레오’이다. 이 단어는 잘못을 ‘비난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과 모인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파악한 상태다. 악한 감정으로 모함하고 있음을 안다. 실정법 체계에서도 처벌할 근거가 없음을 말하는 표현이다.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카테고레오’라는 단어는 ‘카테고로스’에서 유래된다. 이 단어는 참소하는 사단을 지칭하기도 한다. 종교 지도자들과 모인 사람들의 배후에 사탄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이 전투는 종종 비난과 모함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말에 힘이 있음을 사탄도 잘 안다. 그래서 파괴적인 말로 낙담시키려고 한다. 모함하는 말로 끔찍한 고통을 주려고 한다.
누구나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때 고난이 올 수 있다. 험담과 비난, 누명과 모함으로 올 수 있다. 종종 영적 전투 때문이기도 함을 기억하자. 이때 십자가의 승리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참소하는 사탄의 소리를 거절하자. 대신 겸손히 성령님을 의지하자. 성령님의 사상과 생각이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자. 사탄이 참소하는 소리보다 말씀이 들리게 하자.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선포한다. 죄가 없으면 석방되어야 한다. 보상금도 지급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한 판결을 내린다. 죄는 없지만 “때려서 놓겠다.”라고 한다. 이렇게 모순된 재판이 어디 있는가? 한마디로 엉터리 재판이다(15-16절).
나 자신은 참소하는 악한 영들의 활동을 감지한 적이 있는가? 오늘 영적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범죄자 바라바
다수의 목소리가 크다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빌라도의 판결을 듣는다. 만족하지 못하고 갑자기 “바라바를 석방시키라.”라고 한다. 왜 그럴까? 흉악한 범죄자인 바라바보다 예수님이 더욱 악하다는 주장이다(18-19절).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한다. 하지만 소용없다. 오히려 더욱 소란스럽다. 무리는 아예 로마 최고 형벌인 십자가형을 요구한다. 빌라도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세 번째로 같은 말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모인 사람들의 커지는 목소리가 이긴다. 빌라도가 무리의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들어준다. 엉터리 판결이다(25절).
오늘날 재판에서는 지더라도 항소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엉터리 재판에 대해 나는 항소, 이의제기를 할 수 없다. 예수님 대신 석방된 바라바가 곧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죄인 중의 괴수가 우리다.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셨기에 바라바가 석방된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 지셨기에 죄의 감옥에서 석방된 것이다.
19절과 25절을 보자. 바라바가 얼마나 흉악한 범죄자였는지를 강조하고자 2번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판결은 엉터리 재판의 결과다.
마찬가지로 사형당해야 할 바라바가 엉뚱하게 풀려난다. 바라바의 재판도 엉터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은혜의 구원을 주시는 섭리로 작용한다. 주님 대신 석방된 범죄자 바라바가 곧 우리임을 기억하자. 즉, 엉터리 재판의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사람이 우리다.
나 자신은 구원의 감격이 있는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까?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