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월) QT 불의함을 이기는 기도의 힘
- Chang Yong Park

- Jun 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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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누가ㅇ음 18장 1~14절)
불의한 재판관과 정직한 과부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 남편을 잃어 먹고 살길이 없는 여인은 사회적 약자이자 도움의 대상이었다. 본문의 여인 역시 경제적인 곤란함으로 인하여 재판관을 찾아갔다. 율법에 따른다면 여인이 속한 공동체가 이 과부를 도와야 마땅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여인을 돌보지 않았다. 이에 과부는 친척들이 율법을 어기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재판관에게 요청하였다(눅18:3). 하지만, 재판관은 율법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또, 주변의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자였다. 그런 자가 과부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이것은 과부가 염려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염려되어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간절히 기도하되 응답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뜻이 아닐까?
우리 역시 기도를 진심으로 못할 때가 있다. 때로 몇 번 기도하다가 응답 될 것 같지 않으면, 돌연 기도를 포기해 버린다. 포기하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응답 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5절에서 ‘괴롭게 하다’의 헬라어는 ‘휘포피아조’이다. 여인이 재판관을 괴롭게 한다기보다는 여인의 행위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나타낸다. 재판관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인물이다.
가끔 믿는다고 하면서 믿는 대로 실천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판관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과부는 믿음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판관이 불편하게 생각할 정도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 행동은 개인의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하며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기에 행동하신다. 오늘 과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믿음대로 실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 나는 믿음대로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믿음의 간구를 하고 있는가?
인정받는 기도자
이 땅 환대는 짧지만, 하늘 환대는 영원하다. 본문에는 두 부류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 부류는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세상으로부터 멸시받던 세리이다.
먼저 바리새인의 경우 기도할 때 세상 사람들이 듣도록 자신이 한 일들을 강조하며 기도한다. 11절에 ‘따로’는 ‘자기 자신에게’란 의미로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한다는 뜻이다. 또 성전에서는 가식적인 헌금도 잘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할 자격이 없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가슴을 치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한다. 여기서 ‘불쌍히 여겨 달라’(눅18:13)는 헬라어 ‘힐라스쎄티’는 하나님께서 세리의 죄를 덮고 불쌍히 여기셔서 진노를 옮겨달라는 요청이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임을 정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런 공로도 없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까이해 주셔야 한다고 요청한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간절함과 겸손함이 함께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세상의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내 기도 제목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가? 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중보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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