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수) QT_깊은 슬픔에서 회복을 준비하다.
- Chang Yong Park

- Sep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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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8.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사무엘하 19장 1-10절)
요압의 항의
맡겨진 책임을 위해선 뼈아픈 질책도 받을 때가 있다. 다윗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반역을 제압했다는 승리의 기쁨과 안도감도 분명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만이 다윗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슬픔에 지배당한 다윗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백성들의 수고와 희생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에겐 그날의 승리가 기쁨이 아닌 슬픔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싸움에 패배해서 도망치는 사람처럼 부끄러움을 느꼈다(2~3절).
이 소식을 들은 요압이 다윗 앞에 나선다. 그리고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왕께서 이렇게 슬퍼하시는 건 왕의 부하들을 멸시하시는 겁니다. 차라리 우리가 패하고 압살롬이 살았다면 왕께서 더 기뻐하셨을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다. 다윗은 한 아들 압살롬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들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않은가! 너무 슬픔에만 잠겨있는 건 아버지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왕을 따르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요압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제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왕으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당연한’ 행동이다. 이처럼 요압은 슬픔에 빠져있던 다윗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왕에게 한 말 속에 담겨있는 요압의 진의는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왕의 지위에 있는 다윗에게 왕의 책임 또한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지위가 높을수록, 따르는 자들이 많을수록 그 책임은 더욱 무거울 것이다.
귀환을 준비
성도는 인생의 연약함 속에서도 신실함을 추구해야 한다. ‘약삭빠르다’는 말이 있다. “눈치가 빠르거나, 자기 잇속에 맞게 행동하는 데 재빠르다”는 뜻이다. 지금 다윗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가 딱 그랬다. 얼마 전까지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다윗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압살롬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승리하자 빠르게 태세변환을 한 것이다. 도무지 사람에 대한 예의나 의리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약삭빠른 행동을 하고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서서 다른 백성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다윗이 했던 업적들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다윗이 잠시 예루살렘에서 ‘나가셨으나’ 이제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셔야’ 한다며, 백성들을 향해 “왜 이 일에 잠잠하고 있냐?”며 외친다. 참으로 낯뜨거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과 목숨 앞에서는 한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 외쳤던 예루살렘 성 군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낯빛을 바꾸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외쳤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떨까? 성경 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쉽게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쉽게 비난하고 정죄하는 그들의 모습이 혹시 내게도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끝까지 신실하셨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똑같이 신실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간의 모습과 한계를 봤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세상을 향해 좀 더 신실한 삶을 결단하고 사는 게 마땅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이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는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오늘 나는 어떤 삶의 태도를 결단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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