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화) QT_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 Chang Yong Park

- Sep 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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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2.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3.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4.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5.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 6.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8.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9.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10.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말씀을 기억
언약의 말씀을 기억함이 하나님의 기억하심이 된다. 예레미야애가 5장에서는 4장까지와는 다른 전개가 펼쳐진다. 1장에서 4장까지는 애가, 비탄시이며,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5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르지는 않았지만 22절로 구성하였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소망의 핵심 단어가 바로 1절에 ‘기억하시고’라는 단어이다. 히브리어 ‘자칼’로 ‘기억하다, 생각해내다’를 의미한다. 출애굽기 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셔서 출애굽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음을 예레미야는 기억해낸다. 그리고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살펴보시면 지금의 현실 가운데에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도 빼앗겼고(2절), 하나님이 떠나셔서 고아와 과부처럼 되었으며(3절), 우리의 물인데도 돈을 줘야 물을 마실 수 있다(4절).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도 목을 짓누르고 있는 적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함을 구구절절이 호소하고 있다(5절).
상황은 변함없지만,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 슬픔이 변하여 새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 5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신다.
나의 기도는 말씀을 기억하며, 말씀에 의지하는 기도인가?
우리 하나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라는 공동체성이 회복된다. 예레미야에게는 ‘우리’라는 공동체 지체들이 없었다. 주변 사람 전부가 예레미야를 박해하고 핍박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우리’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주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참한 상황을 바라보는 예레미야는 직유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10절). 굶주림의 열기에 그을려 피부가 검게 되었다. ‘검으니이다’의 히브리어는 ‘카마르’로 구약 성경에 단 네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총리가 된 요셉이 동생 베냐민 때문에 마음이 타들어 가듯이 괴로워하는 장면(창43:10), 솔로몬의 재판정에서 자기 자식을 칼로 베지 말라고 애원하는 어머니의 애끓는 마음(왕상 3:26), 멸망으로 치닫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호11:8),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굶주린 동족을 불쌍히 여기는 예레미야 자신의 불타는 마음 상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된다.
동족을 향한 불타는 마음이 있었기에 수많은 적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예레미야는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붙들 수 있었다. 그리고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억하시면 된다는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기억하심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가? 내가 놓치고 있는 ‘우리’라는 공동체성은 없는가?
Photo by Alfonso Scarp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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