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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화) QT_복음을 위한 용감한 반대

  • Writer: Chang Yong Park
    Chang Yong Park
  • Sep 27, 2022
  • 3 min read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장 11-21절)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무조건적인 동의가 때로는 공동체를 아프게 하기도 한다. 본문은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하여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존 스토트는 12절의 “먹다가” 라는 동사가 미완료시제로 기술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었던 것이 통상적인 그의 관행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계시(행10)로 인하여, 사도 베드로는 일찍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문제에 대해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디옥에 도착한 또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 무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 이 할례자들은 유력한 사도인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이러한 시선을 느낀 베드로는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12절).


이 사건은 베드로가 신앙이 성숙하지 않은 연약한 유대인 신자들을 배려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이들은 스스로를 야고보에게서 온 것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도의 대리인이라 주장하며, 바리새파적 율법주의와 믿음을 교묘히 섞어서 주장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또한 당대의 유력한 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자리를 피한 것은, 단순히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이방인의 기분만을 상하게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사도들 중에서도 대표성을 가지는 베드로의 경거망동은 추후에도 율법주의적 신앙을 용인한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자리를 피하였기 때문에, 그는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사도 바울은 결코 베드로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를 비판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는 베드로를 교회의 기둥으로 표현하였으며(9절),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여겼다(8절). 그가 자신보다 먼저 사도로 부름 받은 자에게 공개적으로 수치를 준 까닭은, 이것이 선교에 중차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반대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이신칭의의 복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안디옥 사건을 지적한 바울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독자들을 이끌고 간다. 그가 베드로와의 논쟁을 언급한 이유는 율법주의자들의 다른 복음에 대항하여 올바른 믿음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체계 안에서, 구원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로, 그것은 반드시 신분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율법은 인간을 판단할 잣대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조건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주어진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게 된다.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의 이 복음에 반대하며,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묻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어떤 이단은 구원받은 후의 신자는 거룩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바울의 믿음은 율법 폐기론적인 사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신자, 신분이 변화된 신자들은 변화된 삶의 양태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이해한 두 번째 단계의 구원이다.


구원받은 신자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20절)이다. 이전에 지녔던 육체의 정욕과 소망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 그렇기에 신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으로 그 구원을 성취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가? 동시에 나는 받은 구원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인가?


Photo by Ben Whit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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